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그 특사 (문단 편집) === 헤이그로 가는 여정 === 고종이 처음에 헤이그에 파견하려고 했던 인물은 [[이용익]]이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025235?sid=102|#]] 원래 [[보부상]] 출신에 발이 빨라 하루에 천리를 걷는다는 둥, [[축지법]]을 쓴다는 둥의 소문이 돌던 인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담당해 출세했지만 이내 경제 관료로서 엄청난 수완을 발휘했던 고종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이용익은 1905년 11월 고종의 밀명을 받아 출국했는데 중국 [[상하이]]와 [[연해주]] 등을 오가며 논의하던 도중 김현토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했다. 다만 대한계년사를 지은 정교는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현토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어 강사, 통역 역할을 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이며 김현토의 이용익 암살은 양쪽의 파벌 차이 때문이었다. 다음은 특사 파견 움직임은 상동파라고 불렸던 [[http://www.sangdong.org/intro/history.php|상동교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획됐다. [[대한매일신보|<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이 [[이회영]]에게 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 사실을 알렸고 이회영은 전덕기를 비롯한 상동교회 인사들과 특사 파견을 논의했다. 이동녕, 이시영, 전덕기, 정순만, 이준, 안창호, 이승훈,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으고 황제에게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회영은 대한자강회의 후신격인 대한협회에서 만난 [[내시]] 안호영을 통해 고종에게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구성된 특사 밀파 계획을 전달했다. 이때 이준은 상동교회 청년회 회장이었다. 정사(正使) '''[[이상설]]'''은 前 의정부 [[참찬]]으로서 당시 용정에서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운영했지만 일제가 문을 닫아 버렸다. 망명 전에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아 27세에 성균관장 겸 박사[* 과거의 성균관 대사성.]를 지냈을 정도였고 '''조선에서 처음으로 만국 공법을 공부한 국제 정치, 국제법 전문가이기도 했다.''' 특히 이상설은 당시 의정부 참찬이었다. 즉,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의정부 회의를 담당하는 실무 관료였으며 어떤 위법한 절차가 있었는지 증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부사(副使) '''[[이준(열사)|이준]]'''은 前 [[평리원]] 검사였다. 법관 양성소를 1회 졸업하고 한성 재판소 검사보가 되어 법무 대신 [[이하영]][* 찹쌀떡 장수가 외무 대신이 된 것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친일파 이하영이다.]을 탄핵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본인이 해임당한 적이 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해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통역관 '''[[이위종]]'''은 前 주 러시아 공사관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참서관(參書官)|참서관]]으로서 을사늑약 이후에도 러시아에서 버티고 있던 주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다. 당시 만 23세로 그야말로 홍안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7개 국어'''를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해 '''헤이그 특사가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 고종은 말 그대로 황궁에 '''유폐'''당한 상태여서,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통감부]]가 모두 감시하고 있었기에 이준으로 결성된 특사 일행의 동정은 치밀했다. 3월 24일 고종 황제는 극비에 이준을 만났고 4월 20일자로 신임장을 보냈다.[* 신임장을 전달했느냐, 못 했느냐로 설이 갈리고 전달한 이가 누구냐에 따라 또 3가지 설로 갈린다. 이 중에서 박 상궁이 전달했다는 유자후의 기록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http://leejun.org/bbs/board.php?bo_table=freeboard&wr_id=84|#]] 이 신임장에 찍힌 날인이 붓으로 그린 모작으로 확인되면서 이준 일행이 모작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헐버트 또한 어새가 모작된 신임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작의 주체가 이준 일행이 아닌 어새가 없던 황제 측이라고 보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어새가 모작이 맞으나 전후 상황을 보아 황제의 명령을 받은 특사는 맞는 것으로 보고 있다. 황제가 신임하던 헐버트가 헤이그로 파견돼 이들을 도운 점, 이토가 황제를 만나 헤이그에 특사 파견을 추궁하며 퇴위 시킬 때 고종이 어떤 부정도 하지 않은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첩보 영화 수준의 작전을 통해 위임장을 받은 이준은 이상설과 이위종을 각각 다른 곳에서 만나 합류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감시를 피하고자 했다. 거기다 고종의 친서를 소지한 헐버트가 일본으로 이동하며 기만 작전까지 펼쳤다.[* 그 와중에 헐버트는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불법적으로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간 [[경천사 10층 석탑]]의 반출 현장을 촬영하고 재팬크로니클이란 고베 신문에 '한국에서의 만행'이라는 기고문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도 반환하지 않자 헤이그로 가서 이 사건을 폭로해 뉴욕포스트, [[뉴욕타임즈]] 등이 대서특필 하는 등 석탑 반환을 촉구했다. 이후 석탑은 1918년 다시 한국으로 반환되었다.[[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545239|#]] ] 고종 황제는 신뢰하던 헐버트를 먼저 출국시켜 특사 활동을 돕도록 했다. 이에 헐버트는 1907년 4월 초 한국을 떠나 일본, 중국,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러시아를 거쳐 스위스에 도착했다. 그는 이준 일행의 특사 파견이 탄로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발설하였고 이 때문에 일본은 헐버트가 평화회의에 참석한다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헐버트는 이준 일행이 이미 도착해 활동 중이던 7월 10일 헤이그에 들어왔다. 이준은 특사 위임장, 러시아 황제와 미국 대통령, 만국평회회의 등에 보내는 황제의 친서를 전달받아 서울을 출발하여 4월 2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나가사키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준 일행은 1907년 5월 초순 [[길림성]] [[용정]]에서 온 이상설과 합류하였다.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기서 열흘가량 소요하며 활동에 필요한 외교 서류들을 준비하는 한편 니콜라이 2세를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1906년에는 이미 러일 협약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처음 이범진에게 만국 평화 회의 초청 사실을 알렸던 1904년과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결국 이들은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지 못했으며 고종의 친서만 외무부에 접수할 수 있었다. 이후 이범진의 주재로 탄원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이위종을 만났고, 러시아 호위병의 호위를 받아가며 베를린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헤이그 특사는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역에 도착한 후 바흔스트라앗(Wagenstraat) 124번지 융 호텔(Hotel De Jong) 3층에 투숙하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 중이었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헤이그 특사들은 1907년 6월 29일 만국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6월 30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이미 특사의 타원서와 숙소 주소가 적힌 명함을 받은 네덜란드 수석대표 보퍼르(W. H. de Beaufort)는 세 특사를 방문하였다. 7월 1일부터 17일까지 한꺼번에 기록한 그의 일기를 살펴보면 그는 한국 특사들의 도착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기 이전에 넬리도프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그러나 넬리도프는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전적으로 일본에게 위임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저항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여 사실상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보퍼르는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을 한국특사들에게 전달했음이 기록되었다. 또한 보퍼르는 "그들에게 네덜란드 정부에 그들의 정체성을 알릴 것을 권했다"며 한국특사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 이유는 보퍼르가 "일본이 대한제국과 만주에 정착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결코 좋은 결과가 아니다. 향후 우리 인도 군도(群島)들에도 시선이 향할 것이다"며 일본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선견지명]]이다. 30여 년 후 일본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침공했고 식민지에 거주 중이던 네덜란드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성노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오늘날에도 일본의 과거사 문제나 [[상임이사국]] 진출 등에 있어서 유럽 국가 중 가장 강경하게 대처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네덜란드와의 교류로 인한 난학으로 인해 [[메이지 유신]]에 성공했고, 네덜란드의 중립을 사실상 보증하던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동맹의 동맹에 가까웠던 관계와 비교 사례로 당시 미국이 [[색부호 전쟁 계획]]을 싹 다 만들면서도 내심 최악의 시나리오로는 대 영국전이나 일본이 포함되더라도 대 영일동맹 전 정도를 예상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혜안인 셈.] 러시아는 일찍이 대한제국의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해 알고 있었고 초기엔 대한제국을 독립시킬 수도 있다고 보고 협조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국의 시위와 외교 갈등을 이유로 비협조적으로 변했다. 결국 러시아 외무부와 주일 러시아대사 등은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한 정보를 비밀리에 일본측에 알림으로써 대비하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